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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부호 록펠러 가문 스토리

마크부스 2024. 4. 25. 21:49

뉴욕에 가 본 사람은 록펠러 빌딩을 그냥 지나치지 못할 것입니다. 1934년 완공 이후 가장 잘 지어진 현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데요. 이 가문의 사업하는 능력보다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청교도적인 삶을 살아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록펠러 가문의 탄생 배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록펠러 가문 히스토리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호 가문으로 꼽히는 록펠러 가문을 일으킨 사람은 존 데이비슨 록펠러로 뉴욕주 업스테이트의 리치포드란 시골에서 태어났습니다. 밴더빌트 가문 못지않게 밑바닥 인생에서 출발하였는데요. 그의 아버지도 게으르고 무능한데 바람둥이도 모질라 남을 속이는 사기꾼으로 일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망나니 아버지에 비해서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침례교 신자였고 반듯한 분이어서 아들을 엄하게 교육시켰다고 합니다. 하지만 워낙 집안이 가난하다 보니 존 데이비스 록펠러는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16세부터 직업 전선에 뛰어들게 됩니다.

 

 

 

 냉혹한 흡혈귀

 

 

존 데이비스는 밴더빌트 가문의 코넬리우스와는 다르게 막노동이 아닌 장부를 정리하는 북 키퍼로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차분하고 꼼꼼한 성격에 총명한 지능 덕분에 사장의 총애를 받고 높은 임금을 받으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때부터 자신이 번 돈의 십분의 일을 기부하는 생활을 평생 동안 실천했습니다. 십일조라서 헌금을 했나 보다 싶었는데 헌금이 아니고 교육 사업이나 문화 복지 사업 등 어려운 사람을 위해 도움 되는 일에 투자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냉혈한 혹은 흡혈귀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잔인하고 냉정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록펠러의 주 사업

 

 

그는 당시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등장한 석유 정제 사업을 시작하였는데요. 어머니와 가족을 데리고 클리블랜드에 정착하며 투자가들을 모아 사업 파트너로 만들고 당시 최고 화학자들을 섭외해서 최고의 정제 시설과 기술 개발에 주력하였습니다. 이에 더해 휘발유, 경유, 등유 등 산업용 석유를 포함한 정제된 제품을 가장 싼 가격에 미국 전역으로 운송하는 철도 항만 시설에도 투자하여 큰 성공을 하였습니다. 그가 일궈낸 석유화학 사업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독점기업으로 분류되어 1911년 서른네 개의 기업으로 나누었으나 뿌리가 같으니 막대한 돈을 벌었던 겁니다. 역시 사업은 선점하는 것이 장땡인가 봅니다.

 

 

 청교도적인 삶을 산 록펠러

 

사업에는 냉혈한이었던 존 록펠러는 평생 술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았으며 청교도보다 더 청교도적인 삶을 산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이렇게 자기 관리가 철저하니 큰 부를 축적했나 싶을 정도인데요. 또한, 총명한 두뇌에 비해 어려운 가정 환경으로 학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던지 그는 교육 사업에 가장 열성을 쏟았습니다. 

 

 

1884년에는 애틀랜타에 흑인들만 다닐 수 있는 스펠만 대학을 설립하였습니다.

 

 

 

 

또한, 당시 침례교 계열 대학이던 시카고 대학에 당시로서는 자그마치 8천만 달러라는 거금을 기부해서 세계 최고의 대학 서열로 올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리고 1901년 뉴욕에 설립한 록펠러 인스티튜트 포 메디컬 리서치 연구소에서는 무려 노벨 의학 수상자 23명을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훗날 이곳은 록펠러 유니버시티로 개칭하였습니다. 

 

 

록펠러의 후계자

 

 

록펠러는 4명의 딸과 유일한 아들 존 록펠러 2세가 있었는데 아들에게는 힘든 사업보다는 자신이 설립한 재단을 관리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아들도 아버지 못지 않게 능력 발휘를 하게 됩니다. 물론 평생 재단 이사장으로 살기는 했지만 그는 아버지가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돈이 되는 모든 사업에 투자해서 본인 노력으로 모은 재산 만으로도 세계 16위의 부호가 되었습니다. 그는 주로 뉴욕 맨해튼 지역 부동산에 투자를 많이 했는데 현재까지 뉴욕 아파트 건물 절반이 록펠러 가문 소유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습니다.  

 

록펠러 주니어는 브라운 대학에 다녔으며 재학 중에 칼 막스의 자본론을 읽고 연구하는 클럽의 회장을 맡았는데요. 훗날 이를 두고 당신은 공산주의자라고 뭐라고 하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진정으로 돈을 벌고 싶다면 자본론을 읽으라고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자본론을 읽은 거였답니다.

 

그밖에 그가 한 일은 너무도 많지만 일단 패스하고요. 그는 로드 아일랜드 상원의원의 딸과 결혼해서 여섯 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훗날 그의 두 아들 쟌 록펠러 3세는 뉴욕 주지사로 정치계에서 성공을 하였으며 또 다른 아들 넬슨 록펠러는 포드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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